의사-환자 관계
환자가 병원을 방문하는 목적은, 자신의 질병에 대한 적절한 치료를 받으며 건강과 생명을 돌보려는 것입니다.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는 목적도, 환자에게 적절한 치료를 제공하여 건강과 생명을 돌보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환자와 의사는 같은 목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같은 목적을 향해 가는 '치료적 동맹'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료현장에서 흔히 '라뽀'라고 일컬어지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신뢰의 관계를 내포합니다. 환자가 의사에게 보내는 신뢰는 의사가 고도의 지식과 기술을 갖추었다는 실력에 대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한 실력을 환자를 '위해서' 발휘해 줄 것이라는, 환자를 대하는 관심과 태도에 대한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관심과 태도는 종종 환자에게 의료적 사항을 성명하고 환자의 이야기를 듣는 소통을 통해 드러날 것입니다.
연명의료결정법의 기본 원칙
현행 [연명의료결정법]의 "기본 원칙"(제3조)에는, "모든 환자는 최선의 치료를 받으며, 자신이 앓고 있는 상병의 상태와 예후 및 본인에게 시행될 의료행위에 대하여 분명히 알고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제2항), "의료인은 환자에게 최선의 치료를 제공하고, 호스피스와 연명의료 및 연명의료중단등결정에 관하여 정확하고 자세하게 설명하며, 그에 따른 환자의 결정을 존중하여야 한다"(제3항)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의사와 환자가 주고받는 소통의 필요성을 보여줍니다. 의사는 환자에게 상병의 상태와 예후, 앞으로 시행될 의료행위에 대하여 설명하고, 환자는 의사에게 자신의 희망과 원의를 표현하는 자리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몇 가지 우려
이점을 고려할 때, 현재 우리사회에서 연명의료결정법이 인식되고 실행되는 방식은 몇 가지 우려를 갖게 합니다.
첫째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관한 것입니다. 정부는 이 문서의 작성률에 집중하고, 언론은 이 문서를 작성하는 것이 곧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실현하고 이른바 '존엄사'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홍보합니다. 그러나 이 문서를 작성하는 사람은 종종 '환자'가 아니며, '등록기관'에서 설명을 담당하는 사람은 의료인이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등록기관이 환자의 상병 상태와 예후, 앞으로 시행될 의료행위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러므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작성되는 결정은 환자의 실제적 정보에 의거하지 못합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의사와 환자의 소통 없이 작성되며, 오히려 이런 소통을 불필요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둘째는 '자기결정권'에 관한 것입니다. 환자나 가족이,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생각하는 담당의사의 소견과 양심에 반하는 행위 혹은 중단을 요구하면서 갈등이 일어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현재 회자되는 자기결정권이 환자를 위한 적절한 치료에 반하는 결정마저도 관철시키려는 의미로 인식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치료적 동맹 관계를 무너뜨리고,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돌보는 의료의 기본 성격과 의사의 전문직업성을 변질시킵니다.
한 가지 물음
어떤 환자가 입원하기 전에 미리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였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 환자는 이 문서를 작성해 두었으니, 담당의사에게서 자신의 상병 상태와 예후, 앞으로 시행될 의료행위에 대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될까요? 법적으로는 문제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작성한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있으면, 담당의사가 환자에게 설명하지 않고 임종과정에서 그 문서를 확인하여 이행하기만 해도,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을 것이며,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실현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소통의 생략이 의사와 환자의 관계 측면에서, 연명의료결정법의 취지나 기본원칙의 면에서 과연 적합한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였든 아니든, 담당의사가 환자에게 설명하는 자리는 필요할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환자는 이미 작성한 바를 다시 고려할 수 있고, 담당의사와 환자가 서로 대화하며 연명의료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할 필요성
'연명의료계획서'는 [연명의료결정법]에 규정된 법정 제1호 서식으로, "말기환자등의 의사에 따라 담당의사가 환자에 대한 연명의료중단등결정 및 호스피스에 관한 사항을 계획해서 문서로 작성한 것(제2조, 제8호)"입니다. 이 문서를 작성할 때 담당의사는 해당 환자에게 환자의 질병 상태와 치료방법에 관한 사항, 연명의료의 시행방법 및 연명의료중단등결정에 관한 사항, 호스피스의 선택 및 이용에 관한 사항 등에 대하여 설명하고, 환자로부터 내용을 이해하였음을 확인받아야 합니다(제10조). 이미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였더라도 연명의료계획서를 다시 작성하면, 전자는 효력을 상실하고 후자가 효력 있는 문서가 됩니다 (제12조, 제8항, 제4호).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하면서 담당의사와 환자는 설명·대화·소통을 하게 되므로, 연명의료 결정법의 기본 원칙이 실현될 것이며, 환자에 대한 실제적이고 온전한 정보를 바탕으로 연명의료결정이 가능할 것입니다.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생각하는 담당의사의 의학적 소견과 환자의 원의가 함께 고려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의사와 환자의 치료적 동맹 관계도 실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